382  관리자
 2016.08.12 하늘땅사람의 참길: 도(道)의 신학<김흡영 교수의 도의 신학2>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23

 

생명·생태·도의 신학: 신·우주·인간(삼태극) 의 묘합(2)1)

둘째, 이러한 신우주인간적 패러다임에서 궁리한 생명생태신학을 도(道)의 신학이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도의 신학은 신․우주․인간(하늘땅사람)의 삼재지도(三才之道) 또는 삼극지도(三極之道), 곧 하늘의 길(天道), 땅의 길(地道), 사람의 길(人道)의 ‘묘합(妙合)’을 이루는 ‘참길’을 궁구하는 것이다.2) 생명과 생태와 신학이 이루는 삼극의 묘합도 이러한 사람, 땅, 하늘의 길끼리의 현묘한 만남인 삼태극이요, 그 삼태극이 어울려 이루는 총체적 궤적(道)을 통찰하여 그곳에 동참케 하는 신학을 도(道)의 신학이라고 해보자는 것이다.

삼태극의 묘합으로서 도의 신학은 한국적이다. (김시습은 도의 측면에서 볼 때 천지만물이 모두 같은 태극이라고 보는 흥미로운 한국생태사상을 발전시켰고,3) 우실하는 한국의 고유한 논리가 “3수 분화의 세계관”의 정점인 삼태극, 곧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執一含三 會三歸一)”에 있다고 주장한다.4))

2천년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메타포로 군림해왔던 로고스(logos)는 모더니티의 환원주의적 영향으로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다. 계층적 이원론을 기반으로 하는 반자연적이고 억압적인 기술이성으로 축소된 로고스는 생명생태신학의 근본메타포로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나는 최상의 생명생태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 도(道)를 3천년대 신학의 근본메타포로 사용하자고 주장한다.5) 더욱이 도는 로고스보다도 훨씬 더 성서적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로고스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곧 진리와 생명의 길(道)이라고 했다(요 14:6). 뿐만 아니라 애당초 원시 그리스도교의 호칭도 로고스가 아닌 “그 도를 쫓는 사람”의 “도”였다(행 9:2; 19:9; 22:4; 24:14, 22). 여기서 “길”과 “도”의 희랍어는 “호도스(hodos)”인데, 이 용어는 도와 매우 흡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

원래 도의 신학(theotao)은 로고스신학(theologos)과 그 근대적 보완인 프락시스신학(theopraxis)과 견주어 명명해 본 것이다.6) 로고스와 프락시스의 이원론에 의해 좌초되어 있는 현대신학을 도의 신학으로 재활해 보자는 것이다. 달릴 착(辶) 받침에 머리 수(首)로 이루어진 한자 도(道)는 주체(體)와 운용(用), 존재(being)와 과정(becoming)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도는 ‘움직이는 주체’이며, 항상 ‘과정 속에 있는 존재(being in becoming)’이다.

도는 존재(體, logos)의 근원인 동시에 우주 변화(用, praxis)의 길(軌跡)이다. 그러므로 도는 로고스나 프락시스 중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프락시스의 변혁을 타고(乘) 가는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는 ‘로고스냐 프락시스냐’ 하는 것같이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하는 서양신학이 자주 범하는 흑백논리식 선택이 아니라, 음양으로 구성된 태극과 같이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모두(both-and)를 껴안는 ‘상보적 어울림’의 묘합이다.7)

그러므로 도는 로고스(존재)와 프락시스(과정)가 갈라지는 분기점 위에 우리를 세워놓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궤적과 연합하는 ‘온생명’의 역동적 운동에 스스로 참여하게 만든다.8)

도는 궁극적 길인 동시에 실재로서 앎과 행함의 일치(知行合一)를 이루면서 생명의 사회우주적 궤적에 따라 변혁적 프락시스를 구현한다. 로고스신학이 형이상학중심적인 ‘위로부터의 시각’이고, 프락시스신학이 사회학중심적인 ‘아래로부터의 시각’이라면, 도의 신학은 신우주인간적(時間, 空間, 人間)의 간주체적이고 동중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도의 신학은 관념중심적인 로고스신학이나 운동중심적인 프락시스신학의 대립을 지양하고 ‘행하는 지혜(良知)’로서 통전적이다.

도의 신학은 그 초점을 교회의 정통교리로서 정론(正論, orthodoxy)이나 역사적 상황에 정당한 실천으로서 정행(正行, orthopraxis)보다는, 신우주인간적 궤적(흐름)에 부합하는 삶의 변혁적 지혜와 생명의 바른 길, 곧 정도(正道, orthotao)에 둔다. 그러므로 도의 신학이 추구하는 것은 정론(正論)의 탁상공론이나 정행(正行)의 이념투쟁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포함하는 정도(正道)의 바른 살림살이, 곧 참삶이다.

그리스도교의 삼대 덕목인 신앙, 소망, 사랑에 견주어 말하자면, 신앙은 정론을, 소망은 정행을, 사랑은 정도를 강조한다. 전통적 로고스신학의 특징이 신앙의 인식론이고 근대적 프락시스신학의 그것이 소망의 종말론이라면, 생명생태적 도의 신학의 특성은 사랑의 생명론일 것이다. 다음에 있는 바울과 장자의 두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보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theology] 부분적으로 예언하니[theopraxis]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을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바울, 고전 13:8-13).

생선을 잡기 위해 생선그물이 있는 것이요, 일단 생선을 잡게 되면 그물을 잊어버린다. 토끼를 잡기 위해 토끼올무가 있는 것이요, 일단 토끼를 잡게 되면 올무를 잊어버린다. 뜻을 알기 위해 말이 있는 것이요. 일단 뜻을 알게 되면 말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 말을 잊어버려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 있는 이를 찾을 수 있을까?(장자, 외물편)

이 구절들에서 바울과 장자의 사상은 서로 공명하고 있다. 신앙(로고스)과 소망(프락시스)도 결국 사랑의 도를 체득하기 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들도 “생선그물”이나 “토끼올무”와 같은 것으로 도를 얻기 위한 수단들인 것이다. 일단 사랑의 도를 얻게 되면 이런 도구들, 심지어 “말”(언어)까지도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로고스신학(theology)이 ‘이해(知)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rens intellectum, faith-seeking-understanding)’이고, 프락시스신학(theopraxis)이 ‘실천(行)을 추구하는 소망’(hope-seeking-praxis)’이라면, 도의 신학(theotao)은 생명의 ‘도(道)를 추구하는 사랑(love-seeking-tao)’이다.

신(성부)의 담론으로서 로고스신학이 그리스도교 교의의 올바른 선포(正論)에, 예수(성자)의 운동으로서 프락시스신학이 그리스도교 이념의 올바른 실천(正行)에 초점을 맞춘다면, 성령(神氣)의 신명난 살림살이로서 도의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길(正道), 하늘땅사람의 길을 가는 참삶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최초의 호칭이 로고스가 아닌 “호도스,” 곧 “도”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다름 아닌 하늘땅사람의 참길을 따라 살신성인하여 참삶을 산 참사람, 하늘땅사람의 참어울림, 곧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가르쳐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고 했고, 그 길을 통하지 않고는 진리와 생명인 참삶, 곧 천국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요 14:6). 예수는 정통적 교리, 철학적 신학, 정행의 지침서, 사회혁명이념 같은 것보다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참삶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는 한국 천주교의 창시자 이벽(李蘗)이 이해한 것같이 “인간의 길[人道]과 하늘의 길[天道]이 만나는 곳”이고, 또한 땅의 길과도 만나는 입체적 교차로(십자가)이다.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땅사람의 참길, 신우주인간적 도(Christ as the Theanthropocosmic Tao)라고 할 수 있다.10)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요약하면 험한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혀 “꽃피”를 흘리고 떨어져 버린 억울한 한 생명 예수가 죽음의 장벽을 뚫고 솟구쳐 부활하여 참생명(眞生命)의 근원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1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우주와 화해(中和)를 이루는 신우주인간적 도를 성취하게 만드는 구원과 부활, 곧 참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하늘땅사람 예수의 참길(신우주인간적 도) 그리스도론은 심오한 도의 이야기를 품고 삼천년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좋은 씨알들을 생산할 수 있다. 다석 유영모와 같은 한국신학의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우리 품에 안겨져 이 “알나”들을 우리들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12)

유영모는 그리스도를 “빈탕한데” 또는 “없이계신 님”으로 보았다.13) 빈탕(없이)은 무극이요 한데(계신)는 태극이니,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학의 오메가 포인트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영모는 호방한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펼친다. “우주 궤도의 돌진이 십자가요, 우주 궤도를 도는 것이 부활이요, 세상을 비추는 것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심판이다”(김흥호)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화살형 직선 역사관과 지구역사지평 위에 벌어진 신에 의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좁은 이야기가 아니고, 살신성인한 하늘땅사람 예수가 우주의 궤도(참길)에 파고들어가 그것과 하나(참어울림)가 되어 우주 전체를 밝히고 참생명의 근원이 되었다는 광대무변한 신우주인간적 드라마인 것이다(골 1:16-7; 요 1:3을 비교하라).

유영모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없이 있어”지게 한 사건이다. 서양사람들은 “있”(有)은 잘 알아도 “없”(無)을 모른다고 그가 비판한데로, 실체론적 서양 그리스도론이 그 한계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핵심은 “없음”에서 “있음”을 구현한 “없이있음”(無極而太極 또는 空卽是色)에 있고, 그것이 다름 아닌 무(빈탕)에서 세상(한데)을 창조한 하느님의 우주생성 원리(creatio ex nihilo)인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생명생태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이 “없이있음”의 우주생성원리를 체득하여야 한다. 여기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부정신학(없음)과 케노시스(비움)전통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신학이 온전한 생명생태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실체론적 한계를 극복하고 부정신학 전통을 다시 회복해야한다.

그런데 도를 근본메타포로 수용하는 것에 대하여 서양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동양신학자들이 더 민감하게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종종 본다. “하필이면 왜 그 말썽 많은 도를 다시 들춰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제도권 유교가 그 진의를 왜곡하고, 도를 빙자하여 억압적 만행을 저지른 역사적 오류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로고스보다도 오히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의 역사에도 분명히 억압의 족보는 있다. 따라서 도는 필히 민중학, 여성학, 신식민주의비판, 오리엔탈리즘 등 철저한 의심의 해석학을 통해 재해석된 후 사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재해석을 전제로 해서, 우리 신학은 도를 근본메타포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도-메타포는 성서적이다. 둘째, 서양인들이 오랫동안 그들의 것인 로고스, 프락시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소피아를 선택하여 토착화해 온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것인 도를 근본메타포로 채택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토착화해 볼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 도는 최상의 생명생태적 여성 메타포이다. 넷째, 도-메타포는 “없이있는” 우주생성적 힘과 에너지(氣) 그리고 약함의 혁명적 역동성을 담지하고 있다.

『노자 도덕경』은 도를 “만물의 어머니(萬物之母),” “하늘땅의 어머니(天下之母),” 또는 “신비한 여성(玄牝)" 등 모성을 강조하며 여성으로 간주한다(1, 25, 6).

계곡의 신[道]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신비한 여성[玄牝]이라고 한다.
신비한 여성의 갈라진 틈,
이를 일러 천지의 근원이라 한다,
면면히 이어오면서 겨우 있는 것 같지만,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도다(6).15)

이 신비한 여성(mystical female)으로 묘사되는 도는 결코 나약하지 않고, 오히려 무궁무진하게 역동적인 “뒤집기(反轉) 원리(the principle of reversal)”의 선수이다. 부자보다 가난한 자에게 우선적 선택권을 주는 산상수훈과 해방신학의 하느님과 유사하게, 도는 강(强)보다 약(弱), 대(大)보다는 소(小), 유(有)보다는 무(無), 동(動)보다는 정(靜), 남(男)보다는 여(女), 양(陽)보다 음(陰), 인위(人爲)보다는 무위(無爲)에게 우선적 선택권을 준다.16)

이러한 도의 뒤집기 원리는 또한 되돌아감(復, return)의 원리와 관련된다. “허의 극치에 도달하고 돈독히 정을 간직하라. 만물이 다같이 생육화성을 하지만 [허정한 도를 터득하고 지키는] 나는 만물이 근원에 되돌아감을 볼 수가 있다.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나 결국은 모두가 다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하고, 그것을 복명(復命) 즉 본성으로 복귀한다고 말한다. 복명 즉 본성으로 복귀하는 것을 상도(常道)라 하고, 상도를 아는 것을 총명이라고 한다.”17) 그러므로 21세기의 생명생태신학으로서 도의 신학은 이 복명의 상도를 아는 총명을 갖추고, 도가 분출하는 연약함(弱)과 텅비움(虛)의 역설적 힘, 무위자연의 근원적 에너지를 펼쳐내 보고자 한다.

(“아! 숨님의 솟구침: 억눌린 생명의 기사회우주전기” 및 “결론” 다음에 계속)

1) 2번째 글. 전편은 다음 참조: 신·인간·우주(삼태극)의 묘합(1)

2) 김병호, 김진규 구성, 『아산의 주역강의』, 상(서울: 도서출판 소강, 1999), 55-56.  묘합은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나오는 용어이다(이퇴계, 『성학십도』에서 「제일 태극도」 참조).

3) 김시습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말을 했다: “도(道)로써 천지를 보고 천지로서 만물을 본다면, 나 또한 물(物)이요, 물은 또한 나이다.  천지는 또한 만물이요, 만물은 또한 천지이다.  어떤 물이 나가 아니겠으며, 어떤  나가 물이 아니겠는가. . . . 그런즉 내 몸이 하나의 태극(太極)일 뿐 아니라. 만물 또한 하나의 태극이며, 물물(物物)이 저마다 하나의 태극을 지니고 있다.  천지 또한 하나의 태극인 것이다.” (박희병, 2에서 재인용). 이 사상은 태극을 우주만물의 핵심으로 보는 일물일태극설(一物一太極說)과 일치한다(고회민,『주역철학의 이해』, 169-177 참조).

4) 우실하, 앞의 책, 308.  또한 삼태극의 고유한 논리는 “셋에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체로 삼고, 하나에서 셋으로 나뉘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三一其體 一三其用)”에 있다고 한다.

5) 서양학자들도 도가 최고의 생태적 메타포라는 것에 동의한다. 턱커와 그림은 유교와 도교를 세계종교 전통들 중에서 "the most life-affirming"하다고 평가한다("Series Forward," xxvi). 또한 Mary Evelyn Tucker, Ecological Themes in Taoism and Confucianism," Tucker and John A. Grim, World View and Ecology: Religion, Philosophy, and the Environment (Maryknoll: Orbis Books, 1994), 150-60 참고.

6) 김흡영 도의 신학 II(서울: 동연, 2002); 또한『도의 신학』336-360 참조.

7) “Ether-or” 와 “Both-and”에 대한 분석은 Lee Jung Young, The Theology of Change: A Christian Concept of God in an Eastern Perspective(Maryknoll: Orbis Books, 1979)를 참고하라.  태극의 ‘상보적 어울림’에 대하여서는 김용옥이 그의「어울림 산조」에서 잘 표현하여 주고 있다(김용옥. 『도올논어(3)』[통나무, 2001], 362): “태극은 어울림이다.  어울림은 기와 리의 상보성이며, 세계와 신의 상보성이며, 음과 양의 상보성이며, 불협과 조화의 상보성이며, 자유와 규율의 상보성이며, 美와 醜.의 상보성이며, 자연과 문명의 상보성이며, 형이상과 형이하의 상보성이며, 道와 器의 상보성이다.”

8) 도에 관해서는 Tu Wei-ming, Humanity and Self-cultivation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1979), 35-37 참조. ‘온생명’에 관해서는 장회익,『삶과 온생명』(서울: 솔출판사, 1998) 참조.

9)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이벽의 한국적 신학원리』(분도출판사, 1979), 122 참조.

10) 자세한 것은 “Toward a Christotao: Christ as the Theanthropocosmic Tao," Studies In Interreligious Dialogue 10:1(2000) 5-29; 또는 Christ and the Tao (Hong Kong: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2003), 153-182 참조.

11) 유영모는 매우 미학적인 꽃피 그리스도론을 펼친다.  박영호 편집,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서 생명을 절망에서 희망을』(서울: 홍익제, 1993), 165-166 참조.

12) 김흥호에 의하면 유영모의 “나알 알나”의 영성적 과정은 “나알”은 내가 알임을 아는 것, 즉 계란(알)이 병아리와 닭이 되는 것이고, “알나”는 내가 알을 낳는 것, 즉 닭이 계란을 낳는 것이다.   김흥호 풀이,『다석 류영모 명상록』 3(서울: 성천문화재단, 1998), 215-7 참조. 나는 여기서 이 의미에다 어린애의 속어 “얼라”를 덧붙여 표현해 본 것이다.

13) 류영모, 『씨의 메아리』, 275; 『명상록』 1, 39 등.

14) 김흥호, 「동양적으로 이해한 유영모의 그리스도교관」, 『동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서울: 도서출판 무애, 1993), 301.

15)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소나무, 2001), 70-71 참조(필자의 수정 번역).

16) A. C. Graham, Disputers of the Tao: Philosophical Argument in Ancient China [La Salle: Open Court, 1989], 223 참조.

17) 장기근, 이석호 역,『노자․장자』(서울: 삼성출판사, 1976), 73-74.

   
▲ 김흡영 교수.
<필자 소개>

김흡영 교수는 서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거쳐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 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바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소, GTU 신학과학연구소(CTNS), 영국 캠브릿지 대학 고등신학종교연구원, 일본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이었다. 이후 강남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자, 동 대학 제 1대 학장, 신학대학원장, 교목실장, 우원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최근에는 중국 복단대학 초빙교수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종교와 과학간의 대화에 있어서 세계최고의 권위를 가진 International Society for Science and Religion(ISSR)의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창립회원이자 정회원이다. 종교 과학, 종교 간의 대화, 문화, 종교신학, 조직신학 분야에서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해외 출판업적이 눈부시다. 그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John Templeton Foundation의 GPSS Award 를 비롯하여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김흡영 교수  heupyoungkim@hotmail.com

 
43 국민일보: [서평]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신학과 과학,그 ...  관리자 2006/10/10
42 큐프레스닷컴: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출간 인터뷰--과학과 ...  관리자 2006/10/10
41 뉴스앤조이: 황우석 연구 성과, 생명윤리 문제 짚어보자  관리자 2006/10/10
40 CGN TV: 과학과 종교간 대화의 장 모색  관리자 2006/10/10
39 CTS TV: 국제 학술 심포지엄  관리자 2006/10/10
38 뉴스앤조이: 한국과학생명포럼, 국제학술 심포지엄 연다  관리자 2006/10/10
37 중앙일보: [알림] 16일 '과학과 생명의 미래' 심포지엄  관리자 2006/10/10
36 뉴스앤조이: [책소개]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  관리자 2006/10/10
35 영남일보: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관리자 2006/10/10
34 중앙일보: 부처·예수 같은 반열에  관리자 2006/10/10
33 중앙일보: [즐겨읽기] 이젠 과학 없는 신학을 논하지 말라(...  관리자 2006/10/10
32 Kyoto Newspaper(Japan): 동지사대 줄기세포관련 특강 기사  관리자 2006/10/10
31 중앙일보: [시론] 세계즐기세포허브 어떻게 할 것인가(How t...  관리자 2006/10/10
30 JoongAng Daily: Need to create Eastern ethics  관리자 2006/10/10
29 USA Today: South Korean Scandal Brings Worries in Stem C...  관리자 2006/10/10
[Prev]12345[Next]
 
   
     
 
전 체 : 1,359,667  명